고대 이집트 종교
고대 이집트 종교(Kemet religion)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첫 왕조부터 기독교 유입기까지 약 3천 년 넘게 유지한 다양한 신앙과 장례 의식을 포함하는 종교이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온갖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다양한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집트 제18왕조에 들어서서는 아문과 같은 하나의 신이 다양한 인격체와 모든 신적 권능을 포함하는 것으로 고대 이집트 종교의 신학이 변해갔다.[1] 이집트의 신들은 각 가정집이나 지역의 중심 신전에서 재물 봉납과 기도로 숭배되었는데, 각 이집트의 왕조마다 몇몇 신들이 두드러지게 숭배되거나 신들이 연합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각 왕조의 파라오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종교는 다양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령 파라오의 신성과 같은 교리는 이집트의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하였다.[2] 또한 사후 세계와 같은 신앙은 미라나 피라미드와 같은 독특한 매장 방식을 탄생하게 하였다.[3]
이집트 신화는 지중해 연안 나라들과 유대 민족의 종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일컬어지며 로마 문자 또한 고대 이집트의 신화와 역사를 서술할 때 쓰이던 신성 문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4]
이집트 종교의 양상
고대 이집트 종교는 지중해권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하나의 확실한 교리나 믿음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다. 신 대부분은 당시 사람들에게 괴이하게 느껴졌던 자연의 모습에서 출발하였으며, 몇몇 신들은 타민족들이 믿던 신으로서 이집트 종교에 포섭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 신화는 그리스 신화와 같은 짜임새 있는 신화가 아니다. 각 주요 신전이 있는 도시나 시대마다, 같은 신이라도 신화나 능력이 달라지며, 심지어 창조 신화들도 달랐다.[5] 초기의 이집트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나[6], 후기로 가면서 왕권과 신들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그 양상도 달라졌다. 하지만, 사후세계와 태양신 라의 권력 등 몇 가지 신앙은 거의 모든 이집트 지역에서 공통으로 믿어졌다.[7]
주요 신전들의 사제들은 신들의 계보나 이야기들을 파피루스 등의 매체를 통하여 서술하였으며,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이집트 신화들은 헬리오폴리스와 헤르모폴리스의 신화이다. 이집트의 신들은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 그리스의 신들과 융합되기도 하였으며, 로마 제국에서는 이시스의 축전이 매년 성대하게 열릴 만큼 그 교세를 자랑하였다.
이집트 종교의 철학과 신학
다신교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자연의 움직임과 원리에 신들의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단지 신들이 자연의 현상만 조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연의 요소 속에 신성이 있다고 믿었다.[8] 이 원리는 동물들도 포함되어, 가령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 같은 경우에는 사나운 동물로 여겨진 암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공기나 습기, 땅과 같은 요소도 신으로 섬기어, 공기와 공간의 신 슈나 습기의 여신 테프네트와 같은 신들도 숭배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신들은 추상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는데, 호루스는 파라오의 왕권을 상징하였다.[9] 그래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관점에서 수반된 신 다수를 믿었다[10][9]. 이집트 종교는 자연법칙의 기원과 원리를 설명하고 신자와 사제들이 기도와 제물 헌납을 통해 신들을 달래고 인간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11] 이 다신교 형태는 매우 복잡해서 어떤 신들은 수많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역할도 다양하였다. 그러다 보니 고대 이집트의 후기로 가면 태양과 같은 자연의 힘을 가진 여러 비슷한 신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일도 있었다.[12]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 신들은, 만약 신들이 보인다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글자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미지'와 '신비'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묘사 방식은 신들을 자연의 상징물에 비유함으로써 추상적인 신들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그렸다[13][9]. 예를 들어 죽음의 신 아누비스는 인간들의 시신을 훼손하여 먹이를 먹는 자칼의 머리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의 검은 피부는 고기를 바짝 말린 색의 상징이자 이집트 사람들이 부활의 상징으로 보았던 기름진 검은 토양의 색이다.[14] 하지만, 이 상징주의는 표준화된 것이 아니므로, 많은 신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고대 이집트 초기의 많은 신은 고대 이집트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숭배 도시들과 엮여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의 신앙이 처음 탄생했던 도시와 관계없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이집트의 문화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던 테베의 초기 수호신은 몬수였으나 중 왕국에 들어서 다른 지역에서 유래한 바람의 신 아문이 테베의 수호신이 된 것도 그 이유이다. 또한, 초기 왕조의 수도 사이스의 지역 수호 여신이었던 네이트는 후기에 가서는 역할이 변형되어 포괄적인 수호의 여신이자 저승의 여신이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유명했던 신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변동되었다.[15]
또한, 한 때의 중요한 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힘이 약화되어 비주류의 신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현대 연구에서 "귀신"으로 분류되는 다수의 비주류 신들도 포함하여, 주요 신들보다 특정 소지역에서만 숭배되는 등 비 보편적인 경향이 있었음에도 고대 이집트인들은 두 신들의 계급에 차이를 명확히 두지 않았다. 몇몇 이 "귀신"들은 주요 신들의 부하로서 특정 도시를 수호하는 신이 되기도 하였다. 다수의 "귀신"들이 이승세계에서 신 노릇을 하는 반면에 대부분이 저승세계인 두아트에 거주하는 신들로서 별 볼일이 없었다.[16] 또한, 죽은 자의 영혼은 이 "귀신"들과 같은 수준의 신성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믿어졌는데[17], 가끔 주요 신이 되는 일도 있었다. 모든 파라오는 죽으면, 호루스의 현신으로서 저승세계에서도 최고의 신이 된다고 믿어지지만, 평민이 사망 후에 그러한 숭배를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민 출신인 임호테프는 그 드문 경우로, 건축과 기술의 신으로서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받았다.[18]
신들 간의 조합
이집트 인들은 각기 다른 자연현상들이 서로 연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11] 몇몇 신들을 연계하기도 하였다. 때때로 신들은 한 쌍으로 묶였는데, 이는 남성, 여성과 같이 두 가지의 요소가 자연현상에 개입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양 철학의 태극사상과 유사하다. 부부 신들의 성향 역시 극과 극의 성향이 있는 신들로 묶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창조의 신 프타는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의 남편이며, 하늘의 여신 누트는 땅의 신 게브의 아내이다. 그들은 3명이 하나로 묶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이로 이루어진 3인 가족 형태를 신화에 따온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더 큰 무리를 이루는 때도 있었으며, 8명의 창조신이 무리를 이룬 오그도아드나 9명의 신으로 이루어진 엔네아드등이 그 경우다. 다수의 비주류 신들이 낮과 밤의 기준에 따라 연대 되는 경우도 있었다.[19]
신들 간의 연대는 혼합주의의 과정 속에서 최소 2명의 신이 자웅동체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외국의 신과 자국의 신을 합치기도 하였고, 때때로 이 혼합주의는 하나의 신안에 여러 인격체를 포함함으로써 하나의 신으로부터 여러 종류의 관점을 보이게 하는 때도 있다. 가령 바람과 공기의 신 아문과 같은 경우에는 투탕카멘 치하에 테베의 사제들에 의하여 태양신 라와 함께 아문-라로 합쳐졌으며, 그 결과 자연세계에서 보이는 그 무엇보다도 더 강력한 숨겨진 힘을 상징하는 신으로 숭배받았다.[20]
이집트 종교의 일신교 풍조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서 최대 숭배 대상은 호루스를 포함한 태양신 라와 이시스였다. 이집트 신왕국에 이르러서 아문도 이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아문의 신학은 일신교 사상에 가장 근접했었다.[21] 태양신 라와 합쳐져, 아문-라가 되고 보이지 않는 모든 힘의 절대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신이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22][23]
아문 사상에 기반을 둔 이집트의 문학 작품에서는 그 어떠한 신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이에 대해 많은 이집트학자는 전통적으로 다신교인 이집트 종교가 일신교로 가려는 경향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집트 학자인 에릭 호르눙은 이집트 종교가 절대 완벽한 다신교가 아니라고 10년간 주장하였는데, 이집트의 많은 글에서 특별한 신을 지칭하는 "유일한" 또는 "모든 존재들의 군주"와 같은 글에서 그러한 면이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이집트인들이 일반적으로 "신"이나 "무엇이든지 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24] 그의 논쟁은 이집트 종교를 순수한 다신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린다.[25]
근래에 들어선, 제임스 앨런과 얀 아스만과 같은 학자들도 이집트 인들이 어느 정도 단 하나의 신만을 인정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26][27] 앨런의 절충안은 이집트 인들이 혼합주의의 과정 속에서 다신교와 일신교를 동시에 섬겼던 주장에 도달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이집트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다신교의 형태 속에서 유일신을 인정했을 수도 있음을 보인다. 또한, 보통의 이집트 인들은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여러 신중 하나의 신만을 믿는 일신숭배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26][28]
아톤주의
신왕국(기원전 1570~1070년)시대의 파라오 아크나톤은 왕권까지 위협하는 아문 사제들의 권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기존 다신교를 폐지하고 정확한 의미의 일신교를 국교로 삼았다. 아톤(아텐)은 그 일신교의 유일신으로서, 태양의 원판, 광선으로 묘사된다.[29] 하지만, 이 조치는 이집트 전통과 반대되었고[30], 아텐의 비인격적인 본성은 하나의 신과 다른 신들과 연결을 주지못하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 신앙은 아크나톤의 사후, 다시 다신교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아크나톤은 후대 이집트 후손들에게 이교도로 비난받게 되었다.[31] 아톤 신앙은 유대교계 종교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타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신을 공간, 영역에 구속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서 학계로부터 주목받았으나, 유대교계 종교와의 연관성은 고고학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우주론과 창조론
이집트 신화의 우주는, 법과 조화, 진리의 여신 마트의 힘으로 다스려진다고 이집트 사람들은 믿었다. 마트 여신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의 정의와 영원한 우주와 관계가 있었다. 그녀는 모든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다스리는 자로서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주의 창조 때부터 존재한다고 믿어졌다. 사람들에게 마트는 모든 사람과 모든 계급 사회의 조화를 의미한다. 마트에 대한 거역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법칙 속에 살아야 했다.[32]
자연에 마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의 균형을 의미한다. 이것은 낮과 밤, 계절 그리고 인간 세대의 순환을 포함하는 거대한 법칙이다[32].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간을 수평적으로 인지하였는데, 순환적으로도 보았다. 이 변화 속에서 이집트인들은 마트가 무질서한 것을 부수고 새롭게 부활시킴으로써 우주의 근본적인 창조물들이 계속해서 순환한다고 생각하였다.[33] 그래서 많은 이집트인의 종교의식에는 우주의 순환과 관련된 의미가 많았다.[34][35]
마트는 또한 각각의 기본 원소들을 제자리에 고정해주어 세계의 구조를 지탱하는 역할도 한다[32]. 이집트 인들은 세계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하였는데, 그들이 상상한 세계는 혼돈과 심연의 신 누로 인격화된 무한한 물(아비스, 심연)에 둘러싸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대지의 신 게브로 묘사되는 땅이 접시처럼 떠있으며, 그 위에는 하늘의 여신 누트가 땅과 사이에 공기의 신 슈를 놓고 아치모양으로 엎드려 있다. 낮 동안에는 태양신 라가 태양의 돛단배를 타고 누트를 따라 수놓아져 있는 천상의 나일 강, 은하수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며[36], 태양의 돛단배가 두아트라 불리는 계곡을 따라 지하 세계(저승)로 들어가면 밤이 되었다. 두아트는 서쪽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는 거대한 뱀 아펩이 있어, 라는 해 질 녘마다 이 뱀과 싸워야 했다. 만약 라가 이 뱀에 지면, 일식이 찾아왔다고 이집트인들은 믿었다. 하지만, 라는 늘 아침이 되면 동쪽 하늘에서 부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일 강 서쪽 땅은 피라미드와 같은 무덤을 짓는 죽음의 땅으로, 동쪽 땅은 사람들이 사는 부활의 땅으로 인식하였다.
신성한 파라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왕권도 자연의 힘이라 보았다.[37]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 인간의 육체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파라오는 이집트에서 사람과 신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38] 그는 마트의 법칙을 받들어야 했으며,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공정해야 하고, 백성 간 갈등을 해결해야 하며, 식량의 공급을 보장해야 하고, 신전 건축과 봉헌을 통하여 신을 달래는 임무를 하여야 했다.[39] 그 이유에서 신전 벽화에서는 종종 마트의 상징을 받드는 파라오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40] 그래서 이집트 신학적으로 그는 전 세계의 통치권을 가졌으며, 이집트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왕"이라는 단어는 파라오만이 쓸 수 있었다.[41][42]
왕 또한 이집트 특유의 혼합주의 속에서 다른 신들과 연계되었다. 파라오가 살아 있을 때는 왕권의 수호신인 호루스의 현신으로 일컬어진다.[43] 파라오는 또한 라의 아들로서 라와도 연계되었는데, 이는 왕으로서 모든 자연의 힘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44] 한때는 아문과 라가 합쳐진 아문-라도 파라오와 융합된 적이 있었다.[45] 몇몇 여신들은 파라오의 "어머니"로서의 기능을 하였다.[46]
파라오가 죽으면, 왕은 완전한 신성을 갖게 되어 라와 죽음, 부활의 신이자 호루스의 아버지인 오시리스에게 직접적으로 융화된다.[47] 많은 장례 신전들은 신이 된 파라오에게 제물을 바치기도 하였다.[48]